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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Cheomseongdae Observatory, Gyeongju) 역사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선덕여왕 때 지어진 신라시대의 천문대입니다. 신라 왕궁 터인 반월성의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국보 제31호이고 그 원형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입니다. 고분을 제외한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보원이나 재건 없이 창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첨성대(瞻星臺)는 그 이름대로 '별[星]을 보는 [瞻]' 용도로 사용되었고 전해져 내려왔고 조선 후기까지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으나,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습니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기록이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는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합니다. 게다가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었다는 점도 의문으로 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첨성대의 역할이 천문대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비 혹은 제단,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상징물', '과학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이 자리에 과거 천문대가 있기는 했지만 목조 건물이었으므로 지금은 사라졌고 폐사지의 석탑, 포석정지의 석구(石溝)처럼 천문대의 '부속 건물'만 남은 것이 지금의 첨성대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하며, 주류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 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첨성대(Cheomseongdae Observatory, Gyeongju) 구조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基壇部),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圓筒部), 다시 그 위의 정자석(井字石) 정상부(頂上部)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땅속에는 잡석(雜石)과 목침(木枕) 크기의 받침들,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기초를 다진 돌 위에 2단으로 된 기단석이 놓여 있습니다. 기단부는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하단은 5.36m, 상단은 5.18m이며, 두 단이 다 높이가 39.5cm로서 두 단을 합쳐서 79cm의 높이가 됩니다. 이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습니다.
기단 위의 원통부는 높이 약 30cm인 부채꼴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는데 27단의 높이는 8.08이며, 최하단의 원둘레는 16m, 제14단의 둘레는 11.7m, 최상부인 제27단의 둘레는 9.2m입니다ㅏ. 제13~15단에 걸쳐서 장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인 정방형의 창구(窓口)가 나 있습니다. 이 창구의 아랫변의 돌은 대형의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의 면적을 크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입니다. 그 내벽은 선형석(扇形石)의 꼭지 부분이 삐죽삐죽 나와 있습니다.
원통부의 제19단과 제20단에는 각각 동북, 동서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네 개가 ‘井’ 자를 이루는데 그 장대석의 끝은 원통부의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습니다. 같은 구조가 제25단과 제26단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의 것이 동서, 위의 것이 남북으로 걸쳐서 ‘井’자를 이룹니다.
맨 위인 제27단에는 동쪽 절반이 평판석으로 막혀 있습니다. 이 평판석은 그 아래의 장대석에 놓여 있는데 윗면이 둘레의 제27단보다 약 6cm가 낮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평판석이 없이 환하게 뚫린 서쪽 절반의 공간으로 나온 제27단의 선형석의 끝에는 3개에 걸쳐서 일직선으로 인척이 패어 있습니다. 두께 6cm 정도의 나무판[木板]을 동반부의 평판석과 이 인턱에 걸치면 중앙에서 위로 뚫린 공간이 막히고 상부에는 ‘井’ 자석 안에 네모난 방이 형성됩니다.
제27단의 원통부 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井’ 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사각형의 정상부를 이룹니다. 이 ‘井’ 자석의 길이는 306cm, 높이와 너비는 각각 32cm, 두 단의 높이를 합치면 64cm, ‘井'자석이 이루는 내부 정방형의 한 변은 220cm로서 재래의 한옥방 한 칸의 넓이가 됩니다. 이 ‘井’ 자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 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 대하여 서쪽으로 약 8°가 돌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성(花崗石)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습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닙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총높이가 9.51m가 되는데 홍사준(洪思俊)은 사다리 세 개를 마련하여 한 개는 지상에서 중앙 창구까지, 한 개는 중앙 창구 안에서 내부의 제19-20단의 ‘井’ 자석까지, 나머지 한 개는 제19.20단에서 제25.26단의 ‘井’자석까지 걸쳐서 정상의 ‘井’자석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오르내리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상부에 서거나 앉거나 또는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는데 매우 편리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