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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Five-Story Stone Pagoda at Jeongnimsa Temple Site, Buyeo) 역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여 정림사지에 있는 후기 사비 백제의 석탑(石塔)으로,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전 하는 유이(唯二)한 백제시대의 석탑입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오 층 석탑의 설립 배경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언제 석탑이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시기인 6세기 중엽에 석탑이 설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의 1층 탑신 4면에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새긴 기공문(紀功文:공훈을 오랫동안 기념하기 위해 새긴 글)이 있어 한동안 '평제탑(平濟塔)' 혹은 '소정방탑(蘇定方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1942년 절터 발굴조사에서 '太平八年成辰定林寺大藏當草 '(태평팔년술진정림사대장당초)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기와에 적힌 정림사(정림사)라는 글씨를 근거로 절터의 이름이 '정림사지'가 되었으며 이 석탑의 이름도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이 되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역사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 석탑으로 희소성이 있으며 한국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한국 불탑의 재료가 목조에서 석조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석탑의 등장 시기를 추측하고,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석탑의 세부 수법은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이며 격조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Five-Story Stone Pagoda at Jeongnimsa Temple Site, Buyeo) 건축학

    화강암으로 제작된 오층석탑으로, 탑의 전체 높이는 8.33m입니다. 당시 목탑의 건축 기법을 석재에 적용하여 제작하였으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 8개의 장대석으로 2단의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1단의 기단과 갑석을 올렸습니다.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우주와 탱주를 세웠으며 우주와 탱주 사이에 면석을 끼워 넣어 기단부를 완성하였습니다.

    5층으로 이루어진 탑신부는 108개의 석재를 결구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각 탑신의 모서리에 배흘림 기법이 적용된 우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2개의 면석을 끼워 넣었습니다. 1층 탑신만이 유독 크게 만들어졌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탑신이 점차 작아지는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석탑의 지붕돌(옥개석)은 낙수면의 귀퉁이가 버선코처럼 살짝 올라간 형태이며, 지붕돌의 결구방식은 전통적인 목조가구의 수법을 그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1층 탑신 4면에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새긴 기공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상륜부는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현재는 노반(露盤)만이 남아있습니다. 노반의 중앙에는 찰주를 세우기 위해 마련된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700여 년의 유구한 백제 역사에 비하여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문화유산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조각이나 공예품에 비하여 건축 자료는 극히 적은데 그럼에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시대 건축의 모든 것을 대변하려는 듯 지금까지 제자리에서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은 금당 앞뜰에 거대한 목탑을 두는 가람배치였습니다. 이 경우 목탑이 차지하는 평면 너비 때문에 금당 앞뜰의 공간은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사찰 안에 목탑과 함께 건립되었기 때문에 세부적인 면에서나 평면 구조면에서 목탑이 위치하는 공간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정림사는 기존의 백제 사찰과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존에 목탑이 금당 앞뜰을 넓게 차지하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시키고 있습니다. 부여 군수리 사지의 경우 탑 평면이 금당 앞의 공간을 차지하는 비율은 1:12인데 반해 정림사의 경우는 1:100으로 금당 앞뜰이 그만큼 넓어져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이는 백제 사찰 가운데 정림사가 유일합니다. 목탑가람이 갖는 공간적인 협소함을 석탑가람으로 변모시켜 공간을 확보한 점에서 일대 변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제인은 미륵사에서 시작된 석탑을 완벽한 단 탑(單塔) 가람으로 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간적인 장점으로 변모,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금당 앞뜰을 대각선으로 연결하였을 때 정(正) 중앙에 탑을 위치시켜 넓은 공간에서도 탑이 공간과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장악하도록 건축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정립 사지 오 층 석탑은 그러한 희소성 외에도 석탑인데도 목탑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독특한 양식, 그리고 660년 백제멸망전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7월 18일 멸망시킨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8월 15일에 정복 기념으로 새긴 비문이 이탑의 탑신에 남아있어 희소성으로나, 형식상으로나, 역사적 이벤트상으로나 모두 나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단골재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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